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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열] 알비레오

Mermaid me 2017. 7. 19. 00:30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왜 전화를 안 받아. 어느새 안내 음성으로 넘어가버린 연결음에 종료 버튼을 틱틱 누르고는 휴대폰을 교복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 학교를 오면 온다 안 오면 안 온다 얘기를 해줘야 할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이래. 짜증에 짜증을 내며 작게 욕을 뇌까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걸음에 짜증이 가득 담겨있다.

8월의 여름은 덥다. 땀에 젖은 티셔츠의 끝자락을 잡고 펄럭대도 더위는 가실줄을 몰랐다. 올 여름 덥다더니 진짜 덥네. 이러다가 더위 먹는 거 아닌가 몰라. 턱을 타고 흐르던 땀이 턱 끝에 메달리다 결국 톡 하고 떨어진다. 대충 손으로 닦아내고는 교실 문을 열었다. 진짜 쪄죽는 건 아닐까. 하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박찬열의 자리에 시선을 두는데 거짓말처럼 텅 비어있다. 소식없는 박찬열은 어제밤 집을 나선 이후로 벌써 열 시간을 넘게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원래 함께 하던 등교도 혼자 했다. 그런데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두고 휘 둘러본 반 분위기가 어째 이상하다. 뭔가 평소보다 처져있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동정에 가득 차있다. 불안한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교실 문을 거칠게 열어재낀 김종인이 내게로 급하게 뛰어온다.

"변백현! 괜찮아?"
"왜?"
"…박찬열은?"
"…어?"
"박찬열, 어제 뺑소니 당해서…. 죽었다고…. 아니야? 지금 교무실 난리났어."
"……."
"야, 변백현. 내 말 듣고 있어?"

순간 숨이 턱 막힌다. 당황스러움에 몸이 덜덜 떨렸다.  온 몸을 뒤덮고 있던 더위가 싹 가신 건 당연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습관처럼 입술을 꾹 물었다. 누가 죽어? 박찬열, 네가?

* * *

허리 아파. 의자에 돌처럼 앉아 세시간을 내리 공부만 하던 박찬열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침대에 누워 시무룩한 얼굴의 박찬열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 아픈 게 이상하지. 그렇게 오래 앉아만 있었는데 안 아플 리가. 궁시렁대며 침대 옆 콘솔에 올려져있던 파스를 박찬열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형은 자기가 강철체력인 줄 아는데, 말도 안 된다. 실은 고작 오십미터만 뛰어도 힘들어하는 저질체력인데 말이지.

"그러다 형 몸 상해. 좀 쉬어가면서 하지."
"나 놀 때 다른 애들 다 공부해. 더 열심히 해야지. 안 미끄러지려면."
"것도 정도껏이지…."

박찬열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를 한다. 시계바늘은 벌써 새벽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는 시간의 경과를 시계바늘의 이동 거리로 보여준다. 이것은 시간의 경과를 공간화한 것인데, 나는 이 공간화 된 시간 속에서 형이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있었는지 새삼 느꼈다. 말리고 싶지만 내가 그래봤자 공부에 있어서는 내 말따위 듣지 않는 형을 잘 알기에 애초에 말릴 시도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형의 공부가 끝날 때까지 형과 함께 깨어있는 것으로 응원을 대신할 뿐이었다. 형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공부 한 번 해볼까 하며 책을 펼쳤다가 오분도 안 돼서 덮어버린 건 내 평생의 비밀이 되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펜을 쥐는 박찬열의 뒷모습을 눈으로 훑어내리다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밖으로 내지 못 할 말들을 입 속에서 굴려본다. 형…나 잠 좀 자자. 공부 그만해….

"형."
"……."
"형."
"……."
"박찬열."
"방해하지 마."
"내일 빙수 먹으러 갈까."
"시간없어. 네 친구들이랑 가."
"내가 쏜다."
"…그래."

박찬열은 단순하다. 이렇게 먹을 걸로 유혹하면 금방 넘어오고 만다. 귀여워. 내가 이 맛에 박찬열 동생 하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같은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찬열은 내게 자신을 형이라 부를 것을 요구했다. 어릴 때라 뭣 몰랐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었고 습관이 되어버린 그 호칭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그냥 박찬열. 하고 부를 때도 많지만 딱히 고칠 생각은 없어서 여전히 형이라 부른다. 우리 형. 단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내가 사랑하는, 나의 형.

* * *

"어떻게 점심시간까지 한 번도 안 깨. 난 너 자다가 저승사자랑 손잡고 데이트라도 가버린 줄 알았어. 어제 늦게 잤냐?"
"알면 좀 조용히 해."
"됐고. 밥 먹으러 가자. 오늘 급식 장난아냐."
"먼저 가. 따라갈게."
"오냐."

방정맞게 대답한 김종인이 애들을 데리고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간다. 날 꽤 늦게 깨웠는지 아이들이 빠져나간 점심시간의 교실에는 나와, 또 여전히 앉아서 문제를 풀고 있는 박찬열만이 남아있었다. 샤프를 쥔 박찬열의 손이 정갈한 수학 풀이들을 빠르게 써내려간다. 박찬열은 학교에서 공부외에 별다른 것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밥도 먹지 않는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친형제같은 사이라고 해도 진짜 친형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난 비밀을 알아가기보다 덮어주고 방관하는 쪽을 택했다. 뭣도 모르고 박찬열의 비밀을 들춰버렸다가 박찬열이 상처받는 꼴은 죽어도 못 볼 것 같았다. 내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설령 형에게 어떠한 강박증이 있다고 해도.

"오늘은 당근주스. 아침에 열심히 갈았어. 남기지 말고 먹어. 집 가서 검사할 거야."
"당근 싫은데."
"그래도 먹어. 편식하다 너 정말 쓰러진다. 대신 내일은 사과?"
"그래."
"나 밥 먹으러 갈게."

형이 밥은 안 먹지만 내가 건네주는 주스는 꼬박꼬박 챙겨먹는다. 받아먹는 주제에 편식도 한다. 하지만 내가 먹으라고 하면 군말없이 먹으니 그리 밉지는 않았다.

"밥 맛있게 먹어."
"응. 화이팅."

형의 책상에 주스를 올려두고 얼른 교실을 빠져나왔다. 다른 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놀기 좋아하고 공부 안 하는 변백현과 말 없고 공부 잘 하는 박찬열의 조합은 분명 새로운 말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둘이 원래 그렇게 친했냐부터 시작해서 족히 몇십개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게 뻔했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라 박찬열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러니까 이건 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아이들과 말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박찬열에 대한 일종의 배려같은 거였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박찬열의 뒷모습을 눈으로 쓰다듬는다. 최선이었지만, 최고의 방법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내 방관은 내게 큰 짐이 되었다. 지금이야 방관하자 생각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고. 저 멀리 급식실 앞에서 날 부르는 김종인에게 대충 손을 휘저어주고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이렇게 지내다보면 언젠간, 박찬열의 숨겨진 비밀들을 알 수 있을까?

* * *

"살 빠졌어?"
"이키로 정도."
"많이 먹어. 형 너 마르는 거 보기 싫어."

내게 안겨있던 형이 내 말에 형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힘을 주어 형을 끌어안다 형의 티셔츠 속에 손을 넣어 마른 허리를 쓸어내렸다. 한가하고 늦은 새벽. 괜히 벗은 몸의 형이 보고싶어졌다. 내 아래에서 발간 얼굴로 예쁜 소리를 내는 형도. 손이 가슴께에 닿자 내게 가만히 등을 대고 앉아있던 형이 내 손을 밀어낸다. 피곤하다는 의미였다.

"한 번만."
"힘들어."

피곤한 목소리로 말 하는 형을 무시하고 형의 티셔츠를 벗겨냈다. 평소같았으면 그만뒀겠지만 오늘은 왜인지 그러고 싶지가 않다. 바지까지 벗겨내자 눈에 띄게 마른 몸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형에게 욕정한다는 걸 아줌마가 알게되면, 난 이 집에서 쫒겨날까? 그런 생각을 하다 이내 떨쳐버리고는 다시 형에게 집중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 눈 앞에 놓인 다 벗은 나의 형밖에 없다. 앉아있던 형을 눕히고 자연스레 형의 위에 올라탔다. 무심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그 시선이 아찔하다. 분명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마치 날 유혹하는 것 같은 눈빛같아 자제력을 잃게 된다. 허리를 숙여 형의 목부터 입술까지 쪽쪽 입을 맞췄다. 내 집요함에 결국 두손 두발 다 든 형이 내 목에 팔을 감아온다.

"내가 형 평생 잡고 살 거야."
"…그래."

그래. 그거면 됐어. 형의 두 뺨을 쥐고 깊게 입 맞췄다. 혀 섞이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린다. 형. 사랑해. 형 평생 꽉 잡고 살 거야. 그러니까 형, 내 옆에 평생 있어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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