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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열] 애증

Mermaid me 2017. 3. 11. 00:12
Written by. ASH

"또 너냐?"
"그러게. 나도 짜증난다."
"타라. 문 닫기겠다."

피곤한 아침이다.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늘 그렇듯 변백현의 얼굴이 보인다.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자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은 변백현이 또 너냐? 하고 말을 던진다. 변백현은 나를 좋아했다. 아침마다 내가 탈 때까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주제에 우연인 척 짜증내는 게 우스워 그러게. 나도 짜증난다. 하고 장단을 맞춰줬다. 그러자 내 손목을 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잡아끌며 타라. 문 닫기겠다. 하는 변백현이다. 말은 툭툭 내뱉었지만 잡아당기는 그 손길이 퍽 다정해 웃음이 나왔다. 변백현은 자신이 날 기다린다는 사실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 생각은 한참 틀렸다. 티를 내질 말든가.

"요즘도 김민석이 괴롭히냐?"
"일상이야, 그거."
"개같은 새끼. 죽여줘?"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죽을 거니까."

전학생이라는 이유로 김민석에게 관심을 가장한 괴롭힘을 받은 지 몇 달 째. 그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해준 게 없으면서 변백현은 입만 잘 놀렸다. 김민석의 욕이라든가 죽여줘? 하는 질문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서자 내리쬐는 햇살이 극성이다. 벌써 여름이다. 더워지는 날씨를 느끼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변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공중에서 한참동안 시선을 섞다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죽여달라고 하면 진짜 죽이려고 할까. 물론 변백현이 김민석을 못 죽일 거란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김민석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애가 걔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죽을 거니까. 하는 내 말에 한참이나 답이 없던 변백현이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이며 말을 한다.

"그래 그럼. 그러든가."
"더 안 물어봐?"
"뭐하러 물어봐."
"왜 죽을 거냐고 안 물어봐?"
"한 두 번인가. 뻔하잖아, 김민석 때문인 거."

죽을 거라는 내 말에 마음이 상했나보다. 원래 같았으면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뭐라도 말을 꺼냈을 텐데 내 질문에 짧게 대답을 할 뿐 다른 때와 달리 조용한 변백현이다. 그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너도 힘들겠지. 틈만나면 손목에 칼 가져다대는 나 살리는 게 힘들겠지. 근데 백현아, 물어봤으면 알려줬을 텐데. 널 좋아하게 될까봐, 그래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까봐 죽으려고 하는 거라고. 말 해줬을 텐데.

애증

시야가 흐리다. 느릿하게 눈을 몇 번 감았다 뜨자 이내 다시 시야가 뚜렷해졌다. 아릿하게 코 속을 파고드는 약 냄새에 이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살기도만 여러번. 죽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죽고는 싶은데 죽을 수가 없었다. 죽으려고 할 때마다 귀신같이 찾아와서 날 살려놓는 변백현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날 선 눈의 변백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다시 돌려 눈을 감으면 변백현의 한숨이 느껴진다.

"야."
"난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려."
"……."
"너도 그래?"
"좀 닥쳐. 그리고 어줍잖게 손목 그어봤자 안 죽어. 동맥은 존나 깊숙히 있거든? 손목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그어야 죽는댄다. 참고하든가."

너도 그래? 하는 내 물음에 한참이나 화난 듯 말을 뱉어내던 변백현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붕대가 감아진 내 손목을 꽉 쥐고 참고하든가. 하며 물기 가득한 목소리를 뱉어낸다. 백현아. 울지 마. 네가 울어도 난 달래주지 못 하잖아. 꽉 쥐어오는 손목 덕에 벌어진 상처가 아렸지만 그것보다는 변백현의 떨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더 아렸다. 자꾸 이러지마 백현아. 나 좋아하는 거 티내지 마. 꽉 쥔 손목이 아릴법한데도 아무런 동요 없이 누워있는 내 눈을 끊임없이 마주하던 변백현이 결국 터지는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인다. 누군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게 변백현이라면 더더욱.

"무섭지 찬열아."
"아니."
"무섭다고 말 해."
"……."
"살려달라고 말 해."
"안 무서워."
"…야."
"하나도 안 무서워."
"…거짓말 하지 마."
"그냥 죽게 내버려 둬."
"……."
"부탁이야."

난 죽어야 되는 사람이니까. 그냥 내버려 둬. 변백현은 내가 살려달라고 말하길 원했다. 무서우니까 좀 살려달라고, 그렇게 내 진심을 말하길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줄 수가 없었다. 난 죽어야 마땅하니까. 이때까지 그렇게 생각해왔고 그게 맞다 못 박아버렸으니까. 부탁이야. 하는 내 말에 결국 변백현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는 내 병실을 나서며 말한다.

"그냥 뛰어내려."
"……."
"내가 손 쓸 수도 없게 뛰어내려, 그냥."

애증

시계는 시간의 경과를 시계 바늘의 이동 거리로 보여준다. 나는 이 공간화된 시간 속에서 변백현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는지 확인했다. 이건 명백한 시간낭비였다. 당장이라도 저 시계의 바늘들을 뜯어내 목구멍에 쑤셔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다행히도 상상에서 그쳤다. 만약 그런다면 변백현이 또 날 살려놓을테니. 이러면 안 된다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변백현의 생각을 억누르기란 힘이 들었다. 차라리 김민석 생각이 났으면 좋았을걸. 얼른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시선을 옮겨 가만히 앉아 휴대폰을 만지는 변백현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리고 말을 꺼냈다.

"김민석이 날 좋아한대."
"요즘은 좋아하면 그렇게 괴롭히나."
"......"
"그럼 사랑하면 어떻게 해야 돼."
"......"
"너 사랑하는데. 난 어떻게 해줄까."

변백현은 꽤나 덤덤한 듯 고백했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휴대폰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도 충동적으로 내뱉고 놀랐을 것이다. 숨이 막힌다. 그러지 말라고 빌고 또 빌었는데 변백현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떨리는 시선을 애써 바로하며 날 바라보는 변백현의 눈과 마주했다. 그 시선이 올곧다. 진심인 게 느껴져 더 힘이 들었다.

"날 사랑해?"
"……."
"백현아, 날 사랑해?"
"…야."
"나 사랑하지 마."
"……."
"그러면 안 돼."
"씨발, 넌 왜 항상 그런 부탁밖에 안 해?"
"……."
"좀 살려달라고 할 순 없어? 김민석 그 새끼 죽여달라고 할 순 없어?"

변백현이 악에 받친 듯 소리질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바이올린을 들었다. 텅 빈 음악실에 잔뜩 화 난 변백현의 목소리만 울렸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난 변백현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반복해서 최면을 건다. 소리지르는 변백현을 뒤로 하고 음악실 문을 열었다. 최대한 담담하게 끝내고 싶었다. 우리의 끝이 무어든, 미련이 남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어디 가."
"죽으러."
"사랑해."
"……."
"가지 마."
"……."
"사랑해. 사랑한다고. 나 너 사랑해. 어?"
"그러지 마, 백현아."
"니가 그러지 마."
"……."
"제발 나한테 그러지 마…."

심장이 아리다. 이렇게도 슬픈 사랑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활을 손에 꼭 쥐었다. 백현아. 고마워. 자꾸 죽으려는 나 사랑해줘서. 그리고 미안해, 널 못 사랑해줘서. 그러니까 백현아,

"행복해야돼."
"너 없이 어떻게 그래. 내가 너 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다음생에는 꼭 살려달라고 말 할게."
"다음생같은 거 필요없어."
"나 이제 갈게. 혹시라도 김민석이 나 찾으면,"
"넌 어떻게 끝까지 이기적이야…."
"……."
"어떻게 니 생각만 그렇게 해…."
"김민석이 나 찾으면 나 이제 행복할 거라고 전해줘."
"……."
"나 이제 행복할 거야, 백현아."

아, 그리고.

"잘 있어."

나 너 사랑할 뻔했어, 백현아.

애증

백현이 눈을 감았다.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왔고 이어서 바이올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또,

"사랑해…."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떨궜다. 밖이 소란스러웠지만 그런 것 따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가만히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사랑해. 온 진심을 다 해 말했지만 그녀는 들을 수가 없었다. 닿지 않을 곳에 있는 네게 닿지 않을 말을 전한다. 사랑해. 선율로 남아 날 잠식하는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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