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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열] 우주

Mermaid me 2017. 2. 13. 19:32
Written by. ASH

혹시 백현아.
응.
혹시라도, 혹시라도 백현아.
…응.
어느 날 우주가 멈춘다면,
…….
나는 널 찾을 수 있을까?

* * *

"안 돼. 나 공부해야 돼. 내일 시험 끝나고 가자."
"아, 한 시간만. 응?"
"공부해라 세훈아."
"가지마! 야! 박찬열!"

애들이 다 너 쳐다본다, 세훈아. 자꾸만 피씨방에 가자며 날 꼬시는 세훈이를 매몰차게 버려두고는 집으로 걸었다. 뒤에서 아 한 시간마안!!! 박찬열!!! 소리치는 세훈이의 목소리가 귓전에 쩌렁쩌렁 울렸지만 지금은 그걸 들어줄 때가 아니었다. 평소같았으면 가주겠는데 시험 전 날은 좀 아니지 않냐. 명색이 고3인데 교과서는 한 번 펼쳐봐야지. 나름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던 터라 성적에 대한 욕심이 생기더라. 뭐,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긴 한데, 딱히 그렇다 할 흥미는 없다.

뭐, 근데 오늘 날씨 진짜 좋네. 나 봄이에요 광고라도 하듯 따뜻한 날씨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려본다. 적당한 햇살, 조용한 거리, 잔잔한 바람. 그래, 혼자 걷기에 모든 게 완벽한데….

"저기요."
"……."
"왜 안 들리는 척 해요?"
"나?"
"네. 왜 자꾸 따라와요?"

아까부터 자꾸 한 남자가 날 따라온다. 학교 앞에서도 봤었는데 집에 다 와가는 지금까지 날 따라오고 있다. 살금살금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가끔 혼잣말까지 해가며 내 뒤를 따랐다. 뭐라더라, 내 우주랬나. 계속 내 우주, 내 우주 중얼거리는데 그게 그렇게 신경쓰일 수 없더라. 곧 집에 도착하니까 그냥 참아야지 하다가도 내 우주, 하는 그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려 남자를 돌아보게 됐다. 저기요. 부르는 내 목소리에도 날 빤히 보기만 하던 그 남자가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키며 왜 안 들리는 척 해요? 하면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 나? 하고 반문한다. 그래요, 너요. 자꾸 나 왜 따라오냐고.

"내가, 내가 보여?"
"왜요. 귀신이라도 돼요?"
"…어."
"…신고할 거예요."
"아니, 잠깐. 진짜 보여?"
"…진짜 귀신이에요?"
"왜 보이지? …너 원래 나 못 봤잖아."
"그럼 원래도 있었단 소리예요?"
"난 원래 이 길에 있었어."

그렇다면 이건 좀 소름돋는 전개인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당신은 이 거리에 있었다는 거잖아. 귀신은 자기면서 잔뜩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그 남자가 진짜 자기가 보이냐며 재차 확인하려 든다. 저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하는 걸 보면 진짜 귀신인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하다 그 남자의 발 밑을 보는데, 어라? 있어야 할 그림자가 없다. 지금 그림자가 없을 시간대인가? 생각하며 고개를 숙여 내 발밑을 보는데 내 그림자는 자신을 어필하기라도 하듯 길게 뻗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온 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다. 어떡해, 저 사람 진짜 귀신인가봐. 지금이라도 모른척 하고 뛸까? 아니야. 귀신이잖아. 나 따라오는 건 일도 아닐걸.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최대한 뻔뻔하게 가자.

"됐고. 언제까지 따라올 거예요? 갈 데가 없어요?"
"아니, 귀신이니까…. 그냥 이 길을 돌아다녀."
"근데 왜 반말이에요?"
"…우리 동갑인데."
"…쨋든. 그럼 날 안다는 소리예요? 내 이름 뭐예요."
"박찬열."
"세상에. 어떡해. 난 당신 몰라요!"
"알아. 집까지 같이 걸어도 되지?"
"네? 네, 뭐…. 그러세요."

그래, 내가 생각해도 귀신 만난 것 치고 쓸 데 없이 싸가지 없긴 했다. 근데 그렇게 반응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더라. 귀신이 보여. 얘기도 했어. 근데 심지어 그 귀신이 날 알아. 여기까지 왔으면 나 지금 기절해도 안 이상한데. 싸가지없는 내 태도에 귀신이 날 저승으로 데려간다 협박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귀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알아. 대답하고는 집까지 같이 걸어가도 괜찮느냐고 물어온다.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너무 애닳아서 그냥 그러라고 대답해버렸다.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글쎄, 내키지가 않더라. 그래서 박찬열 인생 처음으로 귀신이랑 길을 걸어봤다. 근데 별 거 없었다. 발소리만 안 들리다 뿐이지 그냥 사람이랑 똑같았다. 길을 걷는 내내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얼마정도 걸어 집 앞에 도착해 대문 문고리를 잡아 당기려다 그 귀신이 같이 있다는 것이 생각나 뒤를 돌아봤다.

"저기, 들어올 거예요?"
"집에는 못 들어가."
"왜요?"
"…그냥."
"뭐, 알았어요. 저 들어가볼게요. 안녕히가세요."

고개숙여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뭐, 이것이 '예의' 의 범주에 들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대화를 나눈 인연, 인사는 해야하지 않겠나 싶어 그런 것이었다. 근데 난 몰랐지, 이 귀신과 내가 통성명도 하는 사이가 될 줄은.

* * *

다음날도 만난 그 귀신이랑 나는 통성명을 했고, 얘기도 주고받았다. 그 귀신의 이름은 변백현. 일년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단다. 보고싶은 사람이 있어 딱 일년만 이승에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는데, 그 사람은 만났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봐도 그냥 웃기만 할 뿐, 알려주지는 않더라. 말하고싶지 않아하는 것 같아서 그 뒤로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약 2주 동안 변백현과 얘기해보고 느낀 건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것과 나와 코드가 잘 맞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와 아는 사이였냐 물어보려다 그만뒀다. 이유는 그 남자가 날 보는 눈빛에 슬픔이 담겨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변백현이 없기도 했고.

2주 동안 우리는 많이 친해졌다. 등교하거나 하교하는 길에는 늘 변백현이 함께였고 없으면 이젠 아쉬울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리고 등교하는 길인 지금도, 변백현과 함께였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
"오늘."
"에?"
"벌써 일년을 있었는걸."
"그래? 아쉽다…."
"나도. 많이 아쉽다."
"나 하교할 때 까지는 있을 거지?"
"…응."
"다 왔다. 나 들어갈게. 이따 봐."
"찬열아."
"어?"
"…수업 열심히 들으라고. 내 몫까지."
"뭐야, 그럴게."

벌써 일년이 다 됐나보다. 조금 아쉽긴 한데 이게 변백현의 운명이라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보는 눈이 많아 대충 눈으로 인사를 하고는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찬열아. 하고 뒤에서 날 부르는 변백현이다. 그 부름에 대답하면 변백현은 내게 싱거운 말들을 전한다. 그런말을 전하면서도 잔뜩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대답하고는 다시 교문으로 들어섰다. 넌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런 눈으로 말 하냐? 괜히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 * *

몸이 어찌나 피곤한지 3교시 문학시간에는 쏟아지는 잠을 떨쳐내지 못 하고 팔을 베고 그만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이상한 꿈을 꿨다. 찬열아. 하고 날 부르는 목소리. 손을 마주잡고 함께 걷던 등교길. 천천히 닿아오는 입술과 사랑을 속삭이던 목소리. 아주 행복한 순간이 흐르듯 보여진다. 이내 나와 입을 맞추던 그 사람이 날 두고 저 멀리 걸어간다. 손을 뻗으면 더 멀리 달아나는 그 사람. 아무리 얼굴을 확인하려 해도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에 꿈에서 깨어 반을 둘러봤다. 뭐야. 이 꿈 뭔데 이렇게 익숙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나지 않는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냥 이상한 꿈인가…. 그러다 순간 스쳐가는 기억. …설마.

자리에서 일어나 오세훈의 반으로 향했다. 이 기억 뭐야. 내 기억속에 왜 변백현이 있어. 휴대폰을 만지고 있던 오세훈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날 보고 의아한 표정을 한다. 넌 알지. 내 기억속에 왜 변백현이 있는지…넌 알지. 당장 오세훈에게로 다가가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변백현이 누구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해."
"박찬열."
"내가 뭘 잊었는지…빨리 말 해."

* * *

변백현. 하…. 넌 기억 못 하겠지만 변백현이라고, 너랑 사귀던 애. 그러니까, 니 애인이자 내 친구. 교통사고였어. 너 만나러 가는 길이었고. 그 날 너네 일년인가 그랬는데, 하…그래. 그랬어. 백현인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걸 눈 앞에서 보고 기절한 너는 기억을 잃었어. 변백현에 대한 거 전부. 너한텐 큰 충격이었겠지. 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인지 기억을 완전히 다 도려냈대. 넌 변백현 자체를 니 머리에서 지워버린 거야. 기억하고 있어봤자 너한테 악몽일 게 뻔하니까. 그래서 우리 전부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애들도, 나도, 선생님도. 변백현에 관한 거 아무것도 너한테 얘기하지 말자고 약속했어. 변백현에 대한 네 물건들도 전부 치웠어. 근데 어떻게 기억한 거야? 너 괜찮아?

진짜, 변백현 이 멍청한 새끼야. 오세훈에게서 얘기를 듣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이제야 다 기억났다. 변백현 이 멍청이는 왜…. 절로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고 변백현이 있는 길로 뛰었다. 혹여 변백현이 없어지기라도 할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도 개의치않고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늘 걷던 길이 나오고, 가만히 벽에 기대어 날 바라보고 있는 변백현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나온 날 보고 놀란 눈을 한 변백현이 몸을 똑바로하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변백현 이 멍청아. 말을 해야될 거 아니야…. 늘 있던 그 자리에서 변백현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언제나 그랬어. 일년전부터 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어. 내가 잊어버린 너는, 변백현이었어.

"왜 이렇게 일찍,"
"…변백현."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왜 말 안 했어. 왜. 왜 미안하게 만들어."
"…기억 난 거야?"

변백현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끄덕끄덕. 그럼 숨넘어가듯 우는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변백현이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하고 울었다. 예의 어린아이 엄마찾듯, 그리 서럽게 울었다. 일년이나 기다리게 한 것도, 이렇게나 사랑했던 널 잊은 것도 미안해서 나는 단지 울음으로 미안함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내 등을 쓸어내리던 변백현이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온다.

"죽었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억울한 거야."
"하으, 백현아…."
"이 길에서 너만 기다렸어. 등교하는 너, 하교하는 너, 슈퍼가는 너, 찬열이 너."
"왜, 왜 말 안 하고…."
"차마 집 안에는 못 들어가겠더라. 내가 없어도 넌 잘 살고있다는 게 실감이 날까봐. 나 되게 이기적이지."
"아니야, 아니야…."
"네 뒤에서 매일 불렀어. 내 우주, 내 우주 하고. 딱 천 번 쯤 불렀을 때, 니가 날 돌아보더라."

내 우주. 변백현과 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넌 나의 전부라며, 이 세상 전부라며, 그렇게 지은 애칭이었다. 내 우주.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나 이제 가봐야 돼 찬열아."
"안 돼. 안 돼. 그게 무슨 말이야."

고갤들어 바라본 변백현의 손 끝이 희끗희끗하다. 손 끝부터 반짝이는 빛으로 조각조각 흩어진 변백현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안 돼. 안 돼. 이제야 기억했는데 왜 벌써 사라져. 아무리 그 파편을 붙잡아봐도 손 틈으로 흩어질 뿐. 나는 그 허망감에 울음을 입 밖으로 내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눈물이 되어 주륵주륵 흘러내린다. 변백현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기도 울고있는 주제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낸다. 너 없이 나 어떻게 살라고 백현아….

"가서도, 너 사랑하면서 기다릴게."
"나 두고 어디가. 같이 가야지 왜 먼저 가. 잊어서 미안해. 이제야 기억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가지마, 가지마 백현아."
"니가 전에 그랬었잖아, 나한테."
"가지마. 제발 가지마. 응?"
"어느 날 우주가 멈춘다면, 나는 널 찾을 수 있을까? 하고."
"……."
"걱정 마 찬열아."
"…제발."
"너의 우주인 나는 멈췄고, 너는 나를 잊었지만,"
"……."
"내가 널 찾았어."
"하으, 변백현, 변백현…."
"그러니까 울지 마, 내 우주. 기다릴게. 언제나 사랑하면서 기다릴게.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내 우주. …사랑해."

수많은 별빛으로 부서져 날 감싸안던 변백현이 이내 완전히 별빛이 되어 하늘위로 흩어진다. 나는 그것을 보고있을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잘 가 내 우주. 잘 가, 사랑했던 내 우주.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몸이 부서져라 울었다. 변백현이 나를 떠나갔다. 이제야 기억했는데, 일년이라는 시간이 끝나는 이제야 기억했는데.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내 마음이 전해지길 빌 뿐이었다. 잠시라도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내 우주. …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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