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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첸] 감기
*종인이 18살/종대 19살/백현이 20살.
Written by. Ash
"형 일어나. 학교 가야지."
"…몇 신데."
"너 상태 왜 그래."
"감기인 것 같기도…."
"열 봐. 목은 어때. "
평소에는 잘만 떠지던 눈이 철근처럼 무거운 것도, 그 시끄러운 알람소리 (종인이가 직접 녹음해준 일어나 이 잠만보야!!!) 를 못 들은 것도 이상하긴 했다. 나를 깨우러 들어와 형 일어나. 학교 가야지. 하던 종인이가 몇 신데. 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굳히며 너 상태 왜 그래. 한다. 내가 어떻게 아냐. 하지만 일단 유력한 후보는 감기이니 감기인 것 같기도…하며 앓는 소리를 내자 내 이마를 짚어보며 열 봐. 목은 어때. 하는 종인이다. 목 어떠냐고? 죽을 것 같아. 목소리가 갈라져 볼품없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상태 왜 이래 정말. 한 것도 없는데 뜬금없이 걸려버린 감기는 나를 괴롭게 했다.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몸이라든가, 깨질 듯한 머리라든가. 걸걸대는 내 목소리를 듣고 기겁한 종인이가 주머니에서 허겁지겁 폰을 꺼내든다. (폰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꼴사납게 폰을 떨어뜨리기 까지 했다.) 그리고 단축번호를 꾹 누르더니 손톱을 물어 뜯으며 귀에 폰을 가져다댄다. 정신 사납게 뭐 하는 거야. 누가 보면 집에 도둑이라도 든 줄 알겠네.
"누구한테 전화해."
"엄마."
"뭐라고 하게. 괜히 걱정하게 하지 말고,"
"엄마. 형 감긴 것 같은데. 엉. 좀 심한 것 같으니까 오늘 못 간다고 학교에 전화해줘. 독감 각인데. 응. 알겠어. 걱정 마."
야 이 새꺄. 정말 말릴 새도 없었다. 괜히 엄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눈치 없는 김종인이 아주 홀라당 말아 먹으셨다. 그리고는 나와는 일말의 상의도 없이 내 결석여부를 결정해 버린다. 물론 나도 학교를 가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근데 상의도 없이 이렇게 막 정하면 감사합니다 종인 님. 그래, 나도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특히 이런 날에는 말이야. 자꾸만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감았다. 근데 웃긴 게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엄마보다 남자친구인 변백현이 먼저 딱 떠오르더란 거다. 엄마가 먼저 떠오르지 않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창문으로 뛰어내릴 뻔했다. 김종대 미친놈아. 철없이 연애하는 고딩인 거 티내냐. 아픈 게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아플 때 누굴 생각하는 게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 미안해. 그래도 나 엄마 너무 사랑해.
"나 오늘 주번이라 지금 간다."
"어. 그래."
"걱정되는데. 백현이 형 부를까?"
"그러기만 해 봐."
변백현 바쁘단 말이야. 사실 이건 말하기도 슬프지만 변백현은 요즘 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리고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아버지의 회사에 낙하산으로 입사하면서 면접봐서 입사한 사람들보다 열 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노트북을 붙잡고 사는 중이었다. 덕분에 자주 만나지 못 하는 건 물론이고 연락하는 텀도 길어졌다. 이건 내가 서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쎄한 건 어쩔 수 없더라. 덕분에 의도치 않은 징징거림이 생겼다고는 해도. 백현 형 부를까? 하는 종인이의 다리를 툭 치며 그러기만 해 봐. 하자 종인이는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폰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다. 바빠 죽으려고 하는 변백현인데 괜히 감기 하나 때문에 신경쓰게 하고싶지 않았다. 아니다, 나 아픈 거 신경도 안 쓰려나.
"형이 아픈 날도 있고. 별꼴이네."
"빨리 가. 교문에서 걸리지 말고."
"오자 안 하고 올게."
"어, 그래 예비 고3아."
"…실망이다 형."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동생이지만 너 정말 또라이같다 종인아.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내 방을 나서는 종인이에게 손을 흔들다 종인이가 방을 나서자마자 손을 툭, 떨어뜨리고는 눈을 감았다. 종인이고 뭐고 일단 좀 자야겠다……근데 잠깐. 진정한 고3은 나잖아?!
* * *
주위가 시끄럽다.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도 들리고 이마에 무언가 차가운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뭐야, 김종인 벌써 온 건가. 떠지지 않는 눈을 안간힘을 써 힘겹게 뜨면 와이셔츠에 정장바지 차림인 변백현(!!!!!!) 의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나 혹시 잠결에 변백현 불렀냐. 쟤 회사에 안 있고 여기서 뭐 해. 변백현 왜 우리집에 있는지 정말 1도 모르는 내가 멀뚱히 눈을 꿈뻑거리고만 있자 주변을 정리하다 그런 나를 발견한 변백현이 인상을 팍 쓰며 말을 꺼내온다.
"야. 죽을래? 아픈 거 왜 말 안 했어."
"너 어떻게…종인이가 불렀어?"
"아니. 어머님이. 밥 먹었어? 약은. 기침은 없고? 왜 말이 없어."
"…말 할 타이밍이라도 주든가."
이것저것 손에 무언가를 주워담던 변백현은 인상을 쓰며 내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갈아 얹어놓기부터 했다. 종인이가 부른 줄 알았더니 엄마가 불렀단다. 그런 쓸 데 없는 생각은 이내 버려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수건의 찬기운 덕분인지 두통이 덜해진 것 같기도 했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병간호 한 번 해 본 적 없을 변백현이 헛점 하나 보이지 않은 채 행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게 또 심각하게 자연스러워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정정. 심각하게 멋있어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왜 와이셔츠 입고 간호 하는데요. 나 심쿵사 시킬 일이라도 있으신가.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분명히 바쁜 거 확실한데 어떻게 회사랑은 한 시간이나 떨어져있는 우리집에 올 생각을 했느냐 이거다. 분명히 할 일도 많을텐데. 변백현, 너 아무리 차 샀다고 하지만(변백현 차 샀다. 심지어 포르쉐다.) 이렇게 막 와도 되는 거야?
"너 요즘 바쁘잖아."
"근데."
"아니, 어떻게 왔냐고."
"차 몰고 왔는데."
"내 말은,"
"바쁘면서 오긴 또 어떻게 왔는지 묻고 싶지."
어, 그래. 맞아. 그걸 묻고 싶었어. 변백현 바쁘면서 오긴 또 어떻게 왔는지 묻고 싶지. 하는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변백현은 내 침대에 걸터앉아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내 머리를 뒤로 쓸어넘겨주며 말을 꺼낸다.
"물을 걸 물어야지."
"……."
"너 아프다는 말 듣자마자 회사 뛰어나왔는데."
* * *
"회사 안 가봐도 돼?"
"응."
"아버지께 혼나면 어떡하게."
"아버지 해외 계셔."
편한 차림으로 (종인이 추리닝 입었다.) 책상에 엎드려있던 변백현 아버지께 혼나면 어떡하냐는 내 물음에 아버지 해외 계셔. 하며 나를 바라본다. 그래. 해외에 계신다면 니가 한국에서 뭘 하든지 네 아버지는 모르시겠구나. 변백현의 대답에 고개를 두어번 그떡이고 멍하니 변백현을 바라봤다. 난 변백현이 우리집에 온 뒤로 두 시간이나 내리 더 자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덕분에 심심했던 변백현은 내가 일어나면 먹을 죽을 끓이셨다고 한다. 잠에서 금방 깨어 비몽사몽하고 있는 내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춘 변백현이 나를 들어안아 식탁에 앉혔다. 그리고는 죽을 그릇에 담아 내민다. 그 후로 몇 분 동안이나 죽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내게서 그릇을 뺏어간 변백현이 죽을 한 숟가락 크게 퍼서 내게 들이민다.
"좀 팍팍 먹어."
"입 천장 다 까지라고?"
죽 겁나 뜨거운데. 젓가락으로 죽을 휘저으며 뜨거운 김이 오르는 것을 보여주자 변백현은 피식 웃기만 한다. 그 웃음 무슨 의미냐. 입 천장 다 까지게 할 수 있었는데 아깝다. 뭐 이런 거냐? 웃기만 하는 변백현에게 인상을 써 보이자 나를 따라 인상을 쓰던 변백현이 이내 졌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한 번 숟가락을 내민다. 그렇게 변백현과 투닥거리다 보니 어느샌가 나는 죽 한 그릇을 싹 비운 후였다. 근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변백현 성격빼고 모자란 게 도대체 뭐냐. 변백현이 끊인 죽은 성공적이었다. 것도 아주. 종인이한텐 미안하지만 종인이가 예전에 끓여줬었던 죽보다 백배는 더 맛있었다. 비어버린 죽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은 변백현이 내게로 와서 또 다시 나를 안아든다. 충분히 괜찮다고 말 할 수 있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편하게 해준다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감기 걸렸다고 못 걷는 거 아닌데."
"아픈데 걸으면 힘들잖아."
"걷는 게 뭐가 힘들어."
"씁. 그냥 오빠 말 들어."
사양할 필요는 없지만 튕기는 척은 해줘야지. (라고 종인이가 가르쳐줬다.) 나를 안고 내 방으로 향하는 변백현에게 감기 걸렸다고 못 걷는 거 아닌데. 하며 웅얼대자 변백현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는 아픈데 걸으면 힘들잖아. 한다. 걷는 게 뭐가 힘드냐. 손을 들어 변백현의 이마를 밀어내자 변백현은 고개를 틀어 내 손길을 피하며 그냥 오빠 말 들어. 한다. 변백현 가끔씩 자신을 오빠. 하고 지칭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는데 내가 한 살 어리면서 하도 형 취급을 안 해줘서 그런지 그 습관은 아직도 고치질 못 했다. 뭔가 변백현이 오빠. 할 때마다 내가 오빠라고 불러주길 원한다는 느낌이 든달까. 좀 변태같은 변백현의 취향이지만 난 잘 존중해주고 있다.
"야, 변백현."
"응. 왜. 아, 머리 조심하고."
"들어 봐."
"듣고 있어. 이불 똑바로 덮어."
"아, 좀! 오빠!"
"듣고 있다니…뭐?"
결국 저질렀다. 일 년 조금 안 되게 만나면서 항상 야. 아니면 변백현 (아주 특별한 경우엔 백현아. ex) 변백현 삐졌을 때.)이라고 불렀었는데 오빠라고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의 오빠! 하는 외침에 내 이불을 덮어주던 변백현의 손이 뚝 하고 멈춘다. 그리고는 뭐? 하며 나를 바라본다. 아, 아니. 오빠라고 부른 게 그렇게 충격적인가…나를 보는 변백현의 그 시선이 못내 부끄러워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려 덮어버렸다. 아, 미쳤다 김종대 진짜. 무슨 생각으로 오빠라고 한 거야. 아프더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변백현을 오빠라고 부를 패기가 튀어나올 리 없잖아? (아니 그냥 미친 것 같기도 하고.)
"너 방금 오빠라고 그랬지. 나 봐봐."
"싫어."
"아, 존나 귀엽다 진짜."
내 위로 엎어져 내 목을 끌어안은 변백현 계속 귀여워. 를 되뇌이며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아, 진짜 부끄러워 미치겠다. 특히나 이렇게 계속 웃는 변백현 때문에 더더욱. 저리 꺼져! 너 독감 옮는다고! 그렇게 한참을 웃던 변백현이 웃음을 멈추더니 내 양 볼을 두 손으로 쥐곤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댄다. 마주친 두 눈에 거짓말처럼 온 몸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이마로 전해져오는 온기에 마음을 놓는 것보다 감기가 변백현에게 옮겨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커서 고개를 돌리면 다시금 눈을 맞춰오는 변백현이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조용히 말을 꺼내온다.
"바쁘다고 잘 못 챙겨줘서 미안해."
"…아니야."
"너 안 힘들게 하려고 그래."
"……."
"너 대신 내가 힘들고 싶어서 그래."
변백현이 요즘 일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연락 잘 안 되고 해도 가만히있는 건데. 이렇게 미안하다고 말 해오면 나는 어떡하라고 자기 혼자 짊어지는 지 모르겠다. 나 안 힘들게 하려고 그렇단다. 이미 충분히 힘들면서 자기가 나 대신 다 힘들고 싶단다. 어쩌면 이기적일 수 있다 싶은 변백현의 말은 날 눈물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변백현한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두 팔을 변백현의 목에 감고는 죽 끌어안았다. 팔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변백현이 팔을 굽히며 내게 안겨온다. 잠깐 숨을 내쉬던 변백현은 이내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며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사랑해."
"…나도."
"사랑하자…. 우리."
*종인이 18살/종대 19살/백현이 20살.
Written by. Ash
"형 일어나. 학교 가야지."
"…몇 신데."
"너 상태 왜 그래."
"감기인 것 같기도…."
"열 봐. 목은 어때. "
평소에는 잘만 떠지던 눈이 철근처럼 무거운 것도, 그 시끄러운 알람소리 (종인이가 직접 녹음해준 일어나 이 잠만보야!!!) 를 못 들은 것도 이상하긴 했다. 나를 깨우러 들어와 형 일어나. 학교 가야지. 하던 종인이가 몇 신데. 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굳히며 너 상태 왜 그래. 한다. 내가 어떻게 아냐. 하지만 일단 유력한 후보는 감기이니 감기인 것 같기도…하며 앓는 소리를 내자 내 이마를 짚어보며 열 봐. 목은 어때. 하는 종인이다. 목 어떠냐고? 죽을 것 같아. 목소리가 갈라져 볼품없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상태 왜 이래 정말. 한 것도 없는데 뜬금없이 걸려버린 감기는 나를 괴롭게 했다.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몸이라든가, 깨질 듯한 머리라든가. 걸걸대는 내 목소리를 듣고 기겁한 종인이가 주머니에서 허겁지겁 폰을 꺼내든다. (폰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꼴사납게 폰을 떨어뜨리기 까지 했다.) 그리고 단축번호를 꾹 누르더니 손톱을 물어 뜯으며 귀에 폰을 가져다댄다. 정신 사납게 뭐 하는 거야. 누가 보면 집에 도둑이라도 든 줄 알겠네.
"누구한테 전화해."
"엄마."
"뭐라고 하게. 괜히 걱정하게 하지 말고,"
"엄마. 형 감긴 것 같은데. 엉. 좀 심한 것 같으니까 오늘 못 간다고 학교에 전화해줘. 독감 각인데. 응. 알겠어. 걱정 마."
야 이 새꺄. 정말 말릴 새도 없었다. 괜히 엄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눈치 없는 김종인이 아주 홀라당 말아 먹으셨다. 그리고는 나와는 일말의 상의도 없이 내 결석여부를 결정해 버린다. 물론 나도 학교를 가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근데 상의도 없이 이렇게 막 정하면 감사합니다 종인 님. 그래, 나도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특히 이런 날에는 말이야. 자꾸만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감았다. 근데 웃긴 게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엄마보다 남자친구인 변백현이 먼저 딱 떠오르더란 거다. 엄마가 먼저 떠오르지 않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창문으로 뛰어내릴 뻔했다. 김종대 미친놈아. 철없이 연애하는 고딩인 거 티내냐. 아픈 게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아플 때 누굴 생각하는 게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 미안해. 그래도 나 엄마 너무 사랑해.
"나 오늘 주번이라 지금 간다."
"어. 그래."
"걱정되는데. 백현이 형 부를까?"
"그러기만 해 봐."
변백현 바쁘단 말이야. 사실 이건 말하기도 슬프지만 변백현은 요즘 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리고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아버지의 회사에 낙하산으로 입사하면서 면접봐서 입사한 사람들보다 열 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노트북을 붙잡고 사는 중이었다. 덕분에 자주 만나지 못 하는 건 물론이고 연락하는 텀도 길어졌다. 이건 내가 서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쎄한 건 어쩔 수 없더라. 덕분에 의도치 않은 징징거림이 생겼다고는 해도. 백현 형 부를까? 하는 종인이의 다리를 툭 치며 그러기만 해 봐. 하자 종인이는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폰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다. 바빠 죽으려고 하는 변백현인데 괜히 감기 하나 때문에 신경쓰게 하고싶지 않았다. 아니다, 나 아픈 거 신경도 안 쓰려나.
"형이 아픈 날도 있고. 별꼴이네."
"빨리 가. 교문에서 걸리지 말고."
"오자 안 하고 올게."
"어, 그래 예비 고3아."
"…실망이다 형."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동생이지만 너 정말 또라이같다 종인아.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내 방을 나서는 종인이에게 손을 흔들다 종인이가 방을 나서자마자 손을 툭, 떨어뜨리고는 눈을 감았다. 종인이고 뭐고 일단 좀 자야겠다……근데 잠깐. 진정한 고3은 나잖아?!
* * *
주위가 시끄럽다.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도 들리고 이마에 무언가 차가운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뭐야, 김종인 벌써 온 건가. 떠지지 않는 눈을 안간힘을 써 힘겹게 뜨면 와이셔츠에 정장바지 차림인 변백현(!!!!!!) 의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나 혹시 잠결에 변백현 불렀냐. 쟤 회사에 안 있고 여기서 뭐 해. 변백현 왜 우리집에 있는지 정말 1도 모르는 내가 멀뚱히 눈을 꿈뻑거리고만 있자 주변을 정리하다 그런 나를 발견한 변백현이 인상을 팍 쓰며 말을 꺼내온다.
"야. 죽을래? 아픈 거 왜 말 안 했어."
"너 어떻게…종인이가 불렀어?"
"아니. 어머님이. 밥 먹었어? 약은. 기침은 없고? 왜 말이 없어."
"…말 할 타이밍이라도 주든가."
이것저것 손에 무언가를 주워담던 변백현은 인상을 쓰며 내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갈아 얹어놓기부터 했다. 종인이가 부른 줄 알았더니 엄마가 불렀단다. 그런 쓸 데 없는 생각은 이내 버려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수건의 찬기운 덕분인지 두통이 덜해진 것 같기도 했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병간호 한 번 해 본 적 없을 변백현이 헛점 하나 보이지 않은 채 행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게 또 심각하게 자연스러워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정정. 심각하게 멋있어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왜 와이셔츠 입고 간호 하는데요. 나 심쿵사 시킬 일이라도 있으신가.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분명히 바쁜 거 확실한데 어떻게 회사랑은 한 시간이나 떨어져있는 우리집에 올 생각을 했느냐 이거다. 분명히 할 일도 많을텐데. 변백현, 너 아무리 차 샀다고 하지만(변백현 차 샀다. 심지어 포르쉐다.) 이렇게 막 와도 되는 거야?
"너 요즘 바쁘잖아."
"근데."
"아니, 어떻게 왔냐고."
"차 몰고 왔는데."
"내 말은,"
"바쁘면서 오긴 또 어떻게 왔는지 묻고 싶지."
어, 그래. 맞아. 그걸 묻고 싶었어. 변백현 바쁘면서 오긴 또 어떻게 왔는지 묻고 싶지. 하는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변백현은 내 침대에 걸터앉아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내 머리를 뒤로 쓸어넘겨주며 말을 꺼낸다.
"물을 걸 물어야지."
"……."
"너 아프다는 말 듣자마자 회사 뛰어나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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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안 가봐도 돼?"
"응."
"아버지께 혼나면 어떡하게."
"아버지 해외 계셔."
편한 차림으로 (종인이 추리닝 입었다.) 책상에 엎드려있던 변백현 아버지께 혼나면 어떡하냐는 내 물음에 아버지 해외 계셔. 하며 나를 바라본다. 그래. 해외에 계신다면 니가 한국에서 뭘 하든지 네 아버지는 모르시겠구나. 변백현의 대답에 고개를 두어번 그떡이고 멍하니 변백현을 바라봤다. 난 변백현이 우리집에 온 뒤로 두 시간이나 내리 더 자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덕분에 심심했던 변백현은 내가 일어나면 먹을 죽을 끓이셨다고 한다. 잠에서 금방 깨어 비몽사몽하고 있는 내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춘 변백현이 나를 들어안아 식탁에 앉혔다. 그리고는 죽을 그릇에 담아 내민다. 그 후로 몇 분 동안이나 죽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내게서 그릇을 뺏어간 변백현이 죽을 한 숟가락 크게 퍼서 내게 들이민다.
"좀 팍팍 먹어."
"입 천장 다 까지라고?"
죽 겁나 뜨거운데. 젓가락으로 죽을 휘저으며 뜨거운 김이 오르는 것을 보여주자 변백현은 피식 웃기만 한다. 그 웃음 무슨 의미냐. 입 천장 다 까지게 할 수 있었는데 아깝다. 뭐 이런 거냐? 웃기만 하는 변백현에게 인상을 써 보이자 나를 따라 인상을 쓰던 변백현이 이내 졌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한 번 숟가락을 내민다. 그렇게 변백현과 투닥거리다 보니 어느샌가 나는 죽 한 그릇을 싹 비운 후였다. 근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변백현 성격빼고 모자란 게 도대체 뭐냐. 변백현이 끊인 죽은 성공적이었다. 것도 아주. 종인이한텐 미안하지만 종인이가 예전에 끓여줬었던 죽보다 백배는 더 맛있었다. 비어버린 죽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은 변백현이 내게로 와서 또 다시 나를 안아든다. 충분히 괜찮다고 말 할 수 있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편하게 해준다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감기 걸렸다고 못 걷는 거 아닌데."
"아픈데 걸으면 힘들잖아."
"걷는 게 뭐가 힘들어."
"씁. 그냥 오빠 말 들어."
사양할 필요는 없지만 튕기는 척은 해줘야지. (라고 종인이가 가르쳐줬다.) 나를 안고 내 방으로 향하는 변백현에게 감기 걸렸다고 못 걷는 거 아닌데. 하며 웅얼대자 변백현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는 아픈데 걸으면 힘들잖아. 한다. 걷는 게 뭐가 힘드냐. 손을 들어 변백현의 이마를 밀어내자 변백현은 고개를 틀어 내 손길을 피하며 그냥 오빠 말 들어. 한다. 변백현 가끔씩 자신을 오빠. 하고 지칭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는데 내가 한 살 어리면서 하도 형 취급을 안 해줘서 그런지 그 습관은 아직도 고치질 못 했다. 뭔가 변백현이 오빠. 할 때마다 내가 오빠라고 불러주길 원한다는 느낌이 든달까. 좀 변태같은 변백현의 취향이지만 난 잘 존중해주고 있다.
"야, 변백현."
"응. 왜. 아, 머리 조심하고."
"들어 봐."
"듣고 있어. 이불 똑바로 덮어."
"아, 좀! 오빠!"
"듣고 있다니…뭐?"
결국 저질렀다. 일 년 조금 안 되게 만나면서 항상 야. 아니면 변백현 (아주 특별한 경우엔 백현아. ex) 변백현 삐졌을 때.)이라고 불렀었는데 오빠라고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의 오빠! 하는 외침에 내 이불을 덮어주던 변백현의 손이 뚝 하고 멈춘다. 그리고는 뭐? 하며 나를 바라본다. 아, 아니. 오빠라고 부른 게 그렇게 충격적인가…나를 보는 변백현의 그 시선이 못내 부끄러워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려 덮어버렸다. 아, 미쳤다 김종대 진짜. 무슨 생각으로 오빠라고 한 거야. 아프더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변백현을 오빠라고 부를 패기가 튀어나올 리 없잖아? (아니 그냥 미친 것 같기도 하고.)
"너 방금 오빠라고 그랬지. 나 봐봐."
"싫어."
"아, 존나 귀엽다 진짜."
내 위로 엎어져 내 목을 끌어안은 변백현 계속 귀여워. 를 되뇌이며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아, 진짜 부끄러워 미치겠다. 특히나 이렇게 계속 웃는 변백현 때문에 더더욱. 저리 꺼져! 너 독감 옮는다고! 그렇게 한참을 웃던 변백현이 웃음을 멈추더니 내 양 볼을 두 손으로 쥐곤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댄다. 마주친 두 눈에 거짓말처럼 온 몸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이마로 전해져오는 온기에 마음을 놓는 것보다 감기가 변백현에게 옮겨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커서 고개를 돌리면 다시금 눈을 맞춰오는 변백현이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조용히 말을 꺼내온다.
"바쁘다고 잘 못 챙겨줘서 미안해."
"…아니야."
"너 안 힘들게 하려고 그래."
"……."
"너 대신 내가 힘들고 싶어서 그래."
변백현이 요즘 일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연락 잘 안 되고 해도 가만히있는 건데. 이렇게 미안하다고 말 해오면 나는 어떡하라고 자기 혼자 짊어지는 지 모르겠다. 나 안 힘들게 하려고 그렇단다. 이미 충분히 힘들면서 자기가 나 대신 다 힘들고 싶단다. 어쩌면 이기적일 수 있다 싶은 변백현의 말은 날 눈물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변백현한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두 팔을 변백현의 목에 감고는 죽 끌어안았다. 팔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변백현이 팔을 굽히며 내게 안겨온다. 잠깐 숨을 내쉬던 변백현은 이내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며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사랑해."
"…나도."
"사랑하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