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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e zzi
"어, 물이라도 좀 챙겨마시고. 안 갔어. 집이라니까? 그래. 어, 그래. 이따보자."
난 공부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야간 자습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찬열은 나와 정반대였다. 야자로는 모자란 건지 열 두시까지 이어지는 심자마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공부할 게 있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전교 일 등을 해도 박찬열의 엄마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박찬열이 열 두시까지 공부하는 동안 나는 친구들과 놀거나 집으로 가서 자곤했다. 그리고 열 두시가 되면 박찬열을 데리러 다시 학교로 향했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혼자 밤에 다니고 그러면 안 된다. 특히나 박찬열은 약하기 때문에 더더욱. 내 걱정을 하는 박찬열에게 이따보자는 인사를 남기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바라본 집 안이 환하다. 불을 안 끄고 나갔었나 생각하는데 거실 쇼파에 앉아있는 아줌마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박찬열의 엄마가.
"아…. 오셨어요."
"그래. 퇴근하는 길에 반찬 주려고 들렀어."
"네. 아, 찬열이는…학교에 있어요. 어, 야자를 하거든요. …아줌마도 아시죠?"
"…밥은 먹었니?"
아줌마와 나 둘만 있을 때 내가 박찬열의 얘기를 꺼내면 아줌마는 늘 화제를 돌리곤 하셨다. 그럼 나도 아줌마를 따라 화제를 돌렸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탐탁치 않았지만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튀어나오려 하는 말들을 틀어막았다.
박찬열의 집에 얹혀산지 벌써 십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줌마가 박찬열에게 웃어주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잔소리와 윽박. 그게 아줌마가 박찬열에게 보이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에 반해 아줌마는 내게 호의를 잔뜩 베풀었다. 그런 아줌마를 보던 박찬열이 미간을 좁힐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친자식도 아닌 아이를 자신의 아이보다 더 신경써준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한 달에 한 번 받는 용돈도 내가 훨씬 많았다. 물론 그 용돈의 반 이상을 박찬열에게 쓰긴 하지만 난 그것이 늘 의문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답이 무어든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아줌마는요."
"먹었어. 생활비는 안 부족하고?"
"네. 많이 남아요."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말 해."
"아줌마."
"응?"
"찬열이 보고 가세요. 못 본지 오래 되셨잖아요."
입이 방정이지…. 아줌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는다. 아차 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했는지 평소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말들까지 튀어나온다.
"찬열이 공부 열심히 해요."
"알아."
"자기 몸 망쳐가면서까지 해요."
"…뭘 말 하고 싶은 거야?"
"네? 아, 그게,"
"가볼게. 다음에 얘기하자."
굳은 표정의 아줌마가 현관을 나선다. 나의 멍청함을 욕하며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쓸 데 없는 말을 했다. 깊게 개입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괜한 오지랖을 부려버렸다. 굳게 닫힌 현관문을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 가족은 뭔 놈의 비밀이 너무 많다.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담배를 아주 줄담배를. 어? 죽어보자 작정했어?"
아침 조회는 평소보다 길었고, 지루했다. 화장실에서 여러개의 담배 꽁초가 한꺼번에 발견된 덕분이었다. 선생님들도 함께 쓰는 화장실이라 그 담배꽁초 몇 개가 큰 일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며 신나하는 친구들에게 끌려 화장실에 갔을 때, 난 이 사건의 범인이 형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란히 줄 선 담배 꽁초들을 보고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이제 담배는 보기만 해도 토기가 치밀었다. 악취나는 화학물질 덩어리를 왜 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벌써 삼십분 째 장황한 잔소리를 늘어놓던 담임 선생님이 나와 눈을 마주하고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난 네가 범인이라는 것을 다 안다.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볼 안쪽 살을 씹으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우스워서였다. 벌써 반년이 넘게 지났는데 담임은 내가 담배를 피지 못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아, 하긴. 그런 거 알 기회도 없었겠다만. 결국 큭큭. 조그맣게 웃음을 흘리다 선생님의 눈초리에 아무일 없었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웃지도 못하게 하네. 그로부터 십분이나 더 잔소리를 이어가던 담임 선생님은 내게 앞으로 나오라는 말을 전하셨다. 담임은 내가 범인인 줄 아나본데, 그 생각은 한참 틀렸다.
"제가 왜요?"
"제가 왜요오? 허. 야, 너 변백현. 허구헌 날 삥질에 쌈질에. 이제 그걸로 모자라서 담배? 내가 모를줄 알았지."
"저 아닌데."
"그럼 너 아니고 누구야? 우리 반에 너 말고 그런짓 할 애가 어디있어? 반 좀 둘러봐. 너 말고 누가 있냐고."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이런 식으로 몰아가다니. 이게 마녀사냥이랑 다를 게 대체 뭐야. 21세기 지구가 이렇게나 글로벌한데 자기 혼자 무슨 중세시대야? 완전 구닥다리. 반 좀 둘러보라는 말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반을 살폈다. 물론 진짜 둘러보라고 꺼낸 말은 아니었겠지만. 고개를 숙인 아이들 틈 새로 미동없는 자세의 박찬열 눈에 들어온다. 저기 있네요. 우리 반에 나 말고 그런 짓 할 애. 하지만 밖으로 내뱉지도 못 할 말인 것을 알기에 괜히 입 안에서 굴려본다. 까슬한 감촉이 나는 듯해 이내 관둬버렸지만.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뭐? 이게,"
"선생님. 전 담배 냄새만 맡아도 치를 떨거든요."
"……."
"형이 골초라."
선생님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진짜 범인은 형이었다. 하지만 형은 그 난리통 속에서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어찌보면 참 대단한 평정심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선생님이 내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형은 빠르게 손을 놀려 문제를 풀고 있다. 누구 덕에 죄 없는 난 이렇게 누명을 썼는데 정작 자신은 평온한 그 모습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꽤나 괘씸하다. 그래서 괜히 형이 골초라. 하는 말을 꺼냈다. 듣고 좀 놀라라고. 하지만 박찬열은 그 말에도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보일 뿐, 놀란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이게 선생을 바보로 아나…. 얌마. 너한테 형이 어딨어?"
그러게. 당신은 모르겠지. 이 학교 안에서 박찬열과 내가 함께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박찬열 뿐이니까. 학교에 제출하는 개인 정보의 주소도 박찬열의 주소는 본가의 주소로 되어있고 내 주소는 박찬열과 나 둘이서 살고 있는 곳의 주소로 되어있었다. 우리가 남들 앞에선 아는척도 잘 하지 않으니 선생님이 알 리 없는 게 당연했다.
"아, 맞다. 그랬지 참. 깜빡했네. 저 형 없다. 그쵸."
"변백현 넌 진짜…. 잠깐. 박찬열 넌 뭐 하니?"
"……."
"대답 안 해?"
"문제 풀고 있는데요."
"가지고 나와."
…큰일이네. 안 그래도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인데다 내 바르지 못 한 태도에 도를 넘은 선생님의 심기를 박찬열이 더 건들여버렸다. 원래도 조용했던 교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로 물들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선생님이 박찬열을 불러낼 일은 없었을 텐데. 형은 가지고 나오라는 선생님의 말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늘 순종적이던 형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일 만드는 거 그렇게 싫어하면서. 결국 참다 못 한 선생님이 박찬열의 자리로 다가가 박찬열의 문제집을 손에 쥐었다. 여태까지 흔들림없던 형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아줌마에게 뺨을 맞을 때나 볼 수 있던 모습이었다. 난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아팠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형의 모습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형이 힘든 건 싫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나오라는 말 못 들었어?"
"주세요."
"뭐?"
"제 거예요."
"지금 문제 하나 푸는 게 중요한 줄 알아, 너는? 학교에서 신경 써주니까,"
"신경 써? 뭘. 나를? …니네가 언제?"
"…뭐?"
잔뜩 화가 난 선생님이 형의 책상을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교실 여기저기서 놀란 듯한 탄성이 작게 터진다. 박찬열에게로 다가가려다 또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까 걱정돼 자리에 멈춰섰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주먹만 꾹 쥐었다. 팽팽한 분위기가 교실을 잔뜩 메웠다. 그 상황속에서 고개만 숙이고 있던 박찬열이 갑작스레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선다. 선생님이 박찬열의 이름을 연신 불렀지만 형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급하게 교실을 빠져나가는 형의 교복 주머니 속에는 담배곽이 들어있을 것이다. 아직 반이 넘게 남아있을.